제 명대로 살만치 살다가 가는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.
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다.
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증오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라도
한걸음 한걸음 죽어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,
사는 일은 곧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를지라도
네,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.
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″생의 백서″가 되어야 한다.
그리고 이 육신으로는 일회적일 수 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같은 걸
누구를 부를까? (유서에는 누구를 부르던데) 아무도 없다.
철저히게 혼자였으니까.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
그는 결국 타인. 이 세상에 올 때에도 혼자서 왔고 갈 때에도 나 혼자서 갈 수 밖에 없으니까.
내 그림자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일상의 지평을 걸어 왔고
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과 서로 의지해서 살고 있다.
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.
하지만 생명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 밖에 없다.
그것은 보라빛 노을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.
고리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도 말한 바 있다.
나는 인간의 선의지 이것 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.
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된
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
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져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.
이웃의 선의지에 대하여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
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.
허물이란 너무 크면그 무게에 짓눌려 참회의 눈이 멀어 버리고
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는지도 모르겠다.
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.
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.
중학교 1학년 때.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 오던 길에서였다.
엿장수가 엿판을 내려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
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.
이 일이,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.
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강한 엿장수였다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.
그런데 그가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에 지워지지 않은 채자책은 더욱 생생하다.
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.
그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.
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 때 저지른 그 허물이
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?고 있다.
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이런 후회스런 일이
내가 살아 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
그 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
"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
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."
<우파니 샤드> 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.
내가 죽을 때에는 가진 것이 없음으로
본래 무일푼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관념이니까.
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내 머리밭에 몇 권 남는다면,
아침 저녁으로 "신문이오!"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.
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 없는 일.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
한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,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
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 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.
평소의 식탁처럼간단 명료한 것을 즐기는 성미이니까.
무덤도 없을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.
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
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.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
사리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
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꼭 한군데 있다
그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별로 없을 것이므로 가보고 싶다.
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.
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.
다시 출가 사문이 되어 금생에 못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.
- 글 / 법정(法頂) 스님 -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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